▶ 대구사범학생독립운동

   대구사범학교는 1929년 6월 1일 개학을 한 초등교원 양성기관이다. 당시 서울·평양·대구의 세곳에만 있었고, 인원도 100명이었기 때문에 전국의 수재들이 입학하였다. 일제는 이들을 충실한 황민화 교육의 역군으로 양성하려 했지만 어느 교육기관보다 역사의식이 높은 학생들이 많이 새겨 후일 한국 역사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 많이 나왔다. 이들은 비교적 가난한 선비집 자제가 많았고 영어과목은 검정시험을 거쳐야 대학에 진할할 수 있는 제도며, 졸업한 후에 일선 교단에 나가도 교장이 되지 못하는 것이 당시의 형편이었다.
 
   일본인 교사들의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모욕적 차별이 학생들의 반일의식을 더욱 깊게 했으며, 현준혁, 염정권, 김영기와 같은 한국인 교사들은 민족적 자존심이 강하여 은연중에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30년을 전후하여 일부 학생들에게 사회과학 서적을 읽게 하다가 경찰에 적발된 독서회 사건은 현준혁 교사의 지도에 의함이었다. 일제의 압제는 가혹하여 한국어로 일기를 썼다고 퇴학을 시키는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한국 민요집을 만들어 몰래 나누어 가지기도 했다.
 
   1939년 7월 여름이되자 전교생을 전후기로 나누어 근로보국대란 이름으로 학생들에게 중노동을 강요했다. 당시 일제는 경부선 철로의 복선화 공사를 했는데 많은 학생들을 동원하였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왜관 철교에서 약목까지의 구간을 할당받았다. 간악한 일본인 교사는 이런 경우에도 작업량에 있어 일본인 학생에게 유리하도록 했다. 학생들은 평소 악질적인 일본인 교사에 대한 울분이 쌓여 언젠가는 응징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1939년 7월 26일 일본인 학생 하나가 작업장에서 부당한 짓을 하다가 한국인 학생 장봉출과 충돌하였는데, 힘깨나 쓴다는 일본인 학생이 구타를 당하였다. 이에 대해서 일본인의 잘못은 불문하고 한국인 학생만 심하게 꾸짖었다. 한국인 학생들은 저녁 식사 후 회의를 열고 집단으로 역사교사에게 항의했으나 들은 체하지 않아 모기장을 덮어씌워 실력행사를 했으나 어느새 도망가 버렸다. 학생들은 다시 회의를 열어 본부가 있는 일본인 소학교로 대오정연하게 행진해 갔다. 마침 오까모도가 모욕적인 말로 꾸짖는데 학생들은 그가 들고 있던 초롱불을 떨어뜨려 어둡게 하고 주먹세례를 안기었다. 이때 날쎈 마에소노는 달아나 버렸다. 실력 행사를 한 학생들은 졸업반인 7기생 5학년들이었다. 이들은 운동장에 앉아 이찌무라 교장의 처분을 기다렸다. 이찌무라는 자유주의자로서 학생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학생들의 처지는 이해하나 사제의 도에 어긋난다고 꾸짖고 말았다. 이 사건이 이른바 대구사범 7기생의 왜관사건이다. 경찰과 학무당국이 알고 교내의 강경파 교사들의 주장을 어찌 할 수 없어 교장은 7명을 퇴학시키고 11명을 정학시켰다.  7기생들이 악질적인 교사를 응징한 것은 한국인학생들에게 충격과 함께 용기를 주었다.
 
   그 무렵부터 학교내에 3개의 비밀조직이 생겼다. 1940년 11월 대구사범 8, 9, 10기생들이 중심이되어 문예부를 , 1941년 1월 8기생이 중심이 되어 연구회를, 1941년 2월에는 다혁당 9기생들이 중심이 되어 다혁당을 조직하였다.
 
   위의 결성 연월일은 완전히 체제를 갖춘 날이고, 실제는 왜관 사건 직후부터 조직이 형성되고 있었다. 왜관사건 후 후기로 작업장에 간 9기생들은 한밤에 낙동강 백사장에서 북두칠성에 맹세하며 조국의 원수를 물리치고자 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들은 표면상, 문예창작, 학술의 연구, 사람다운 사람이지만, 내용는 조국의 해방이 멀지 않음을 알고 스스로의 소질을 계발하여 그 분야에서 최고 권위자가 되고 교단에 서서는 어린이들에게 한국얼을 심어 주자는데 있었다. 그들 세 단체의 공통된 규칙은
 1. 비밀을 지킬 것
 2. 당수, 부당수와 부장 이상 간부는 매주, 당원은 매월1회 집회에 참가할 것
 3. 부장들은 책임지고 하급생을 지도할 것
 4. 당원은 당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할 것
 5. 정당원은 결단식에 참가한 자에 한다. 등이었다.
 
   구체적인 실천사항으로, 한국인 사이의 결속을 공고히 하고, 한국역사, 한국문학책을 윤독하여 민족혼을 드높이고, 뜻을 굳히기 위해 매일 저녁 북녘을 향해 묵념을 하였다. 토·일요일에는 교외에서 비밀 집회를 열어 정보를 교환하고 외부 인사를 데려와 독립군의 활약, 부산백산상회 이야기들을 듣기도 했다.
 
   1941년 초여름 8기생 정현이 충남 홍성에서 교사로 근무하던중 일본 경찰에게 문예부의 비밀지 '반딧불'이 발각되어 일제히 검거가 시작되었다. 3개 단체의 회원들은 물론, 김영기 교사도 검거되었다. 검찰에서 2년동안이나 끌다가 1943년 2월 8일에야 예심이 종결되었다. 12월 1일 최종판결이 있어 35명에게 5년내지 2년 6개월의 실형이 언도되었다.
 
   이중에서 5명은 해방을 보지 못하고 옥중에서 목숨을 앗기었다.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활의 가혹함때문이었다. 대구 출신 곽재관은 일본유학중 1939년부터 동지들을 모아 독서회를 만들고 민족의 실력배양에 힘썼으며, 대구사범 '반딧불'회원들과 연락 접촉하여 2세 교육을 통해 민족을 찾다가 1942년 4월 대전에서 잡혀 1년 옥고를 겪었다.

by tgm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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